1. 임진왜란 이전 조선이 생각한 일본은?
당시에는 지금처럼 주변국가가 인구가 얼마나 있는지, 땅은 얼마나 넓은지 제대로 알기가 힘들었다. 그나마 명나라에 대해서는 사대주의 사상으로 인해 많이 알고 있었지만, 일본에 관하여는 관심도 없었고 잘 몰랐다. 일반 백성들에게 일본은, 간혹 쳐들어와 노략질을 하는 달갑지 않은 존재였을 것이고, 조선 조정과 왕의 관점에서는 해적질이나 일삼는 귀찮은 나라 정도로 여겼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
그뿐만 아니라 아래 두 지도를 보면 일본이 실제 모습에 비해 꽤나 작게 묘사되었는데,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 (1402)
조선 태종 때 제작되었다.
한반도 아래에 있는 섬이 일본이다.
혹시 일본의 일부만 그린것인가 싶어 확대해 보았는데 중앙에 주요도시를 나타내는 빨간색 칠과 일본이라는 글씨를 보았을 때, 일본 전체의 모습으로 보인다.
<왕반지여지도> (1594)
왕반지여지도는 중국에서 만들어졌다.
실제와 99% 이상 일치할 것으로 판단되는 <구글맵에서 본 한반도와 일본>
구글맵에서 보면 일본은 한반도보다 명백히 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반도보다 3분의 1이상 작게 묘사 된 당시의 지도를 보았을 때, 조선 사람들은 일본을 작은 나라로, 국력 또한 조선과 비교할 수준도 안되는 소국으로 생각하였을 것이다.
2. 조선은 오랜 평화로 인해 제대로 된 군대가 없었다?
임진왜란에 대한 얘기를 시작할 때 조선은 오랫동안 전쟁이 없었기 때문에 평화가 지속되어 제대로 된 군대가 없었다는 얘기로 시작하는 경우가 많다. 이는 큰틀에서 보면 맞는 얘기이지만 자세히 들여다 보면 조선은 여진족 그리고 왜구와 상시 전투 중이였다.
충무공 이순신을 예로들면 임진왜란이 일어난 1592년 이전인 1583년, 1587년, 1588년 북쪽에서 여진족과의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남쪽에서는 1510년 삼포왜란, 1544년 사량진해변, 1555년 을묘왜변, 1587년 정해왜변까지 계속해서 약탈을 당하고 있었다.
추가적으로 정해왜변 이후 일본이 전쟁준비를 하고 있다는 첩보를 입수한 조선조정은 유능한 무관을 적재적소에 배치하기 위해 1589년에 불차채용(순서에 따르지 않고 채용, 요즘 시대로 보면 특진 같은 것)을 실시 하였다. 이순신의 경우 대신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선조의 노력에 힘입어 최종적으로 임진왜란 1년전인 1591년 전라좌도 수군절도사가 되었다. 그리고 마치 운명처럼 1592년 4월 12일이 되서야 전투 훈련을 마치는데 이는 임진왜란(1592년 4월 13일 발발)이 일어나기 하루 전이다.
따라서 조선은 계속해서 군대를 조직하고 있었다고 판단된다.
<16세기 조선군의 전투 복장>
다만 이러한 대비에도 불구하고,
일반적인 왜구의 노략질과 다른 일본 정규군의 규모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점과 경제, 사회적 상황으로 인한 왜적의 대비를 더 많이 못한 점이 조선의 실책이였다.
3. 선조는 이순신을 왜 잡아들였나?
선조는 조선 최초의 대군이 아닌 왕으로서(중전의 아들이 아닌 후궁의 아들이다) 왕이 된 이후로 본인의 정통성에 대한 불안감이 있었다.
이와 동시에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이를 막지 못하고 수도 한양을 버린 뒤 개성과 평양을 거쳐 신의주까지 도망간 선조는 왕권 유지에 대한 불안감이 커져만 갔다.
그러던 도중 1596년 이몽학의 난이 발생하게 되는데, 왕족 출신인 이몽학이, 왜적을 막지 못한 무능한 조정을 심판하고 왜적을 몰아내겠다는 명분을 세워 세력을 키워 나갔지만 결국 진압당한다. 이 사건으로 인해 선조의 왕권 유지에 대한 불안감은 극에 달했고 의병들과 파견된 장수들을 향한 반란을 일으킬 수 있다는 의심이 커져만 갔다. 이 의심은 조선왕조 마저도 고려의 장수였던 이성계가 1388년 일으킨 위화도 회군으로 왕이 되었다는 사실을 생각해보면 합리적인 의심이다.
이런 상황속에서 선조의 정신적 불안감이 계속되었고, 과거에 자신이 파격 승진시켰던 이순신까지도 의심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추가적으로 이순신은 전라도와 그 주변 백성들에게 인기가 있었고, 나라로부터의 지원이 부족하자 이순신은 자체적으로 세금을 걷거나 군량미를 마련하는 등 왕의 입장에서는 "반란을 하는 건 아닐까"하는 불안감을 충분히 느낄 수 있는 상황에 있었다.)
결국, 부산포를 적극적으로 공격하지 않은 이순신을, 조정의 명에 따라 싸우지 않았다는 이유로 파직시키고 서울로 압송한다. 이 과정에서 원균이 올린 상소문 '저라면 부산포로 상륙하는 일본군 장수 가토를 잡았을 것입니다'도 한 몫 했다.
(사실 이순신이 조정의 명에 따라 싸우지 않은 것은 없었다. 다만 현지 상황상 부산에 상륙하는 적의 병력을 공격하라는 지시를 곧바로 이행하지 못했고 몇일 후에 이행했다.)
나는 이순신의 팬으로서 선조가 이순신을 잡아들인 것에 대해 기분이 나쁘지만, 선조의 상황을 보면 선조가 충분히 그럴만도 한 상황이였다고 본다. 꽤 많은 사람들이 선조를, 왜적소탕에 공을 세운 이순신을 파직시킨 미친 임금과 같이 생각을 하는데 그 정도는 아니라고 본다. 또한 이순신이 류성룡에게 적어준 글귀인 '再造山河'재조산하(나라를 다시 만들다)를 보았을 때 '어쩌면 선조 입장에서는 이순신을 잡아들인 것이 맞는 선택이었다'는 생각을 하곤 한다. 그럼과 동시에 '만약 이순신이 이성계처럼 조선이라는 나라를 뒤엎고 새로운 나라를 만들었다면, 그러니까 재조산하 하였다면 지금 이 한반도가 어떻게 바뀌었을까'하는 생각도 하곤 한다.
4. 이순신이 노량해전에서 전사한 것이 아니라 은둔했다거나 하는 루머에 관하여
원균이 대패하고 선조가 이순신을 다시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한 기복수직교서에는 '尙何言哉 尙何言哉(상하언재 상하언재)'라는 내용이 있는데 이 한자의 뜻은 '무슨 할 말이 있으리오. 무슨 할 말이 있으리오.'이다. 임금인 내가 잘못 판단하여 신하인 너를 파직시켜 이러한 상황을 만들었으니 할 말이 없다는 것이다.
당시 조선은 모두 알다시피 중앙집권국가이고 왕에게 거의 모든 권력이 집중되어 권위가 있었던 점을 생각하면 왕이 부하에게 미안하다는 내용이 포함된 교지를 내리는 것은 이례적인 일이다. 이것은 진심이 담긴 사과의 편지라고 할 수 있겠으며, 진심으로 사과를 받은 이순신이 선조가 또 다시 자신을 잡아들인다거나 할까봐 노량해전에서 몰래 사라져 은둔을 하거나 했을 가능성은 꽤 낮을 것이라고 본다. 5~10% 정도. 그리고 노량해전이 끝나고 이순신의 죽음이 알려졌을 때. '사람들이 모두 슬피 울었다'라고 쓰여져 있는 선조실록이나 그 외 문서들을 참고한다면 이순신이 은둔했다거나 스스로 목숨을 끊었을 가능성은 1%미만, 즉 사실이 아닐 것으로 생각한다.
<기복수직교서>
5. 우리는 임진왜란으로부터 어떤 교훈을 얻어야 하는가?
우리는 아주 기본적인 원칙들을 임진왜란으로부터 배워야 한다.
첫번째, 절대 상대를 얕보아선 안된다는 점.
한반도는 이성계가 세운 조선 이후 사대주의 성향이 컷고 명나라를 받들기 바쁘고 일본이나 그 외 오랑캐들은 배척할뿐만 아니라 무시까지 하였다. 하지만 일본은 생각보다 큰나라였고 내전이 끝난 후 모든 힘을 끌어모아 조선을 침공한 일본의 군사력은 위력적이였다.
두번째, 한 국가의 정보력의 수준은 그 국가의 존립마저도 위태롭게 할 수 있다는 것
조선은 일본에 대한 정보가 많지 않아 터무니 없는 지도를 그렸을뿐만 아니라 전쟁 전 일본의 요청으로 보냈던 사신으로부터 정확한 정보도 얻지 못했다. 고대의 국가들이 주변 국가의 정보를 얻기 위해 상인, 종교인 등으로 위장한 첩자를 보냈던 것과 비교하면 거의 손을 놓고 있었다고 봐도 무방하다.
세번째, 다시는 방심해선 안된다.(시간이 흐를지라도 반드시)
조선은 임진왜란으로부터 삼백여년 뒤 일본에게 같은 실수를 반복하여 결국에는 나라를 내주고 만다. 이는 치욕일뿐만 아니라 어이가 없는 일이다. 이로 인해 또 다시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고통 또는 죽임을 당했다. 나는 과거의 실수를 반성하지 못하고 같은 실수를 저지른 조선에 대해, 목소리에 힘을 높여 비난하고 싶으며, 앞으로는 이 땅이 다시는 침공당하지 않게 해달라고 '조선땅에 발을 붙인 왜놈들을 한 놈도 살려 보내지 말라'고 하였던 이순신의 마음처럼 모두에게 호소하며 이 글을 적는다.
"戰方急 愼勿言我死" 전방급 신물언아사
"싸움이 급하다. 부디 내 죽음을 말하지 말라."
<이순신이 노량해전에서 총탄을 맞고 전사하기 직전 부하들에게 전한 말>
어쩌면 이 말은
"조선 백성들을 괴롭히고 죽인 왜놈들을 한명이라도 더 죽여 복수해야 한다. 나는 신경쓰지 말고 싸워라"
라는 뜻이 아니였을까?
중국군과 노를 저어 밤새도록 나아가 날이 밝기 전에 노량(露梁)에 도착하니 과연 많은 왜적이 이르렀다. 불의에 진격하여 한참 혈전을 하던 중 순신이 몸소 왜적에게 활을 쏘다가 왜적의 탄환에 가슴을 맞아 선상(船上)에 쓰러지니 순신의 아들이 울려고 하고 군사들은 당황하였다. 이문욱(李文彧)이 곁에 있다가 울음을 멈추게 하고 옷으로 시체를 가려놓은 다음 북을 치며 진격하니 모든 군사들이 순신은 죽지 않았다고 여겨 용기를 내어 공격하였다. 왜적이 마침내 대패하니 사람들은 모두 ‘죽은 순신이 산 왜적을 물리쳤다.’고 하였다. 부음(訃音)이 전파되자 호남(湖南) 일도(一道)의 사람들이 모두 통곡하여 노파와 아이들까지도 슬피 울지 않는 자가 없었다. 국가를 위하는 충성과 몸을 잊고 전사한 의리는 비록 옛날의 어진 장수라 하더라도 이보다 더할 수 없다. 조정에서 사람을 잘못 써서 순신으로 하여금 그 재능을 다 펴지 못하게 한 것이 참으로 애석하다. 만약 순신을 병신년과 정유 연간에 통제사에서 체직시키지 않았더라면 어찌 한산(閑山)의 패전을 가져왔겠으며 양호(兩湖)가 왜적의 소굴이 되겠는가. 아, 애석하다.
선조 106권, 31년
억울한 조선 백성의 복수를 하려는 마음으로 전투에 임했기 때문에 삼도수군통제사의 직위에도 불구하고 최전방에서 계속 싸웠고, 노량해전에서는 왜적이 도망간다는 소문에 마음이 조급해지다 앞으로 더 나가서 활을 쏘시다 총탄을 맞으신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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